“성경 해석 커리큘럼, 선택은 자유”
스캇 맥나이트의 파란 앵무새를 읽고
책에 대한 성실성 100%
책에 대한 본인의 평가 : ★★★★☆
한줄 평 & 그 이유 :
성경 해석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은 책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들이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추천한다면 누구에게
성경을 읽어 보긴 했지만 이해하기 벅차서 완독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서론
저자에 대한 소개 [1]를 먼저 하자면 스캇 맥나이트(Soct McKnight) “1994년부터 2012년까지 노스 파크 대학교 종교학과의 칼 올슨 석좌교수로 있었으며 현재는 노던 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1] 자신의 전공인 신약학 이외에도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다양한 저술과 글을 기고하는 문필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의 블로그는 이른바 복음주의자가 운영하는 블로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블로그 중 하나로 꼽힌다.[2] “
성경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는 21세기에 사는 독자들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춰서 서술한 책입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기에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본론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소설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일 흥미가 갔던 ‘파란 앵무새’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파란 앵무새는 줄곧 새를 관찰하는 취미를 갖던 와중에 참새가 아닌 파란 앵무새가 돌연 출몰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파란 앵무새는 울부짖게 되는데 주위의 참새들은 다 도망가다가 한 시간도 안되어 적응하고 앵무새를 따라 따라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저희가 파란 앵무새를 마주쳤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과 새장에 다시 가두는 것을 비유로 들며 설명을 이어 나갑니다.
저도 어엿한 기독교 집안의 아들로서 성경은 몇 번 읽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별다른 흥미를 못 느껴서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22년을 살면서 통독이라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그동안 어떻게 지내온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율법책과 같은 인식이 조금 강하다 보니 다가가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의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주위에서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불편한 발견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씀을 믿어. 그러니까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지.”(p. 14) 저는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어? 이게 뭐가 문제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글쓴이는 ‘그대로 따른다고?’ 그럼 이러한 부분은?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오늘날 논란이 되는 주제가 문제인지 성경구절을 보여주면서 성경대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저도 안식일은 예로 든다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출 20:9-10, p 17)”과 같이 본래의 안식일의 개념은 이러합니다. 이것이 개정되었다고 한들 무엇을 보면서 지켜야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시합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하여 성경대로 산다는 삶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이러하니깐 이렇게만 해석해라 가 아닌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이전에는 어느정도 신학 공부를 한 후에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지 알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말이 많은 신천지를 봐도 그렇습니다. 비유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진리다, 이렇게 따라와라 란 식의 잘못된 해석이 판을 칩니다. 물론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몫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조금 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성경을 읽는 것에 5가지의 지름길이 있다고 합니다. 항상 지름길이 좋은 뜻만은 아닙니다. 그저 목표를 향해 빠르게 가기 위해 중간과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절대 지름길은 없으며 있다고 한들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길이 아닌 방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저와 같이 성경읽기를 따분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느낄 것입니다. 그저 율법책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그저 참을성이 없는 율법만 지키면 잘 해주시는 분으로 해석합니다. 따분하기만 하고 ‘그냥 하나님과의 율법만 지킨다면 지켜주심 밑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면 되겠네, 왜 지키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성경의 한구절을 더 늘리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던 저이기에 어느정도 공감이 되긴 했습니다. 그저 율법책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 구절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이렇게 이행해야만 한다. 마치 퍼즐조각을 맞추듯 더 이상 퍼즐을 맞추기 않기 위해서 적당히 해석하고 치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앞에서 말했던 파란 앵무새를 새장속에 가두어 길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파란 앵무새를 지배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행하기 위해서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접근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과는 다르게 거장(예를 들면 바울이나 예수님)의 시야에서만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단편적인 해석입니다. 어느 정도는 해석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항상 옳다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지름길이 있지만 따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마치 라디오나 책을 읽는다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과 반대로 영상을 토대로한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는 이해하기는 쉬울 수는 있어도 그러한 방식으로만 해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지름길을 이용하여 성경을 해석해 나가는 것은 옳지 못한 해석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이야기의 형태로 해석하고 성경을 작은 장과 절로 보는 것이 아닌 성경 전체로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때에 그때의 방법으로 옆에 계십니다. 모세 때의 모세의 방법으로 도와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이라는 매체를 통해 저희에게 어떠한 말을 하고자 하실 것입니다. 자고로 ‘독서’란 저자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을 주셔서 작성한 저자와 그걸 21세기에 읽게 되는 독자 사이의 소통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해석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1세기에 적용되었던 말씀들이 지금에 와서 무조건 지켜야만 한다라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죠. 그 시대를 고려하여 적용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을 전통적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전통주의가 존재합니다. 주로 어떠한 내용을 다루냐면 할례(지금의 포경수술)를 받아야한다, 혼전 순결, 이혼하면 안된다, 기타 등등 성경 그대로의 해석이 낳은 결과입니다. 물론 그대로 내려오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곧이곧대로 한다면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 시대에 맞게 그 때의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전문가들이 성경해석에 있어서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방금 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해야한다는 구절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구절을 보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이 마저도 계획하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이행하고 차별점을 두면서 추후에 나라가 없어지고 소국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면 그들이 다시 뭉칠 수 있게 하신 것이라면? 실제로 그들은 뭉쳤고 1949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선포를 했습니다. 물론 방식에 문제가 있었지만 다시 그 땅을 찾고 나라를 새운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문화, 관습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은 후로 죄를 짖는 것으로 인한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소외로 죽음과 같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관계회복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성경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군대나 회사 같은 곳에서의 관계는 주로 어떻게 형성됩니까? 강압적이고 권위적으로 관계가 형성됩니다. 하지만 저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틀 자체가 다른 경우죠.
저자는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하와를 주신 것과 같이 저희를 일일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 구절 중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라는 말이 있습니다.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저희와의 관계가 단절되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책에는 ‘취사 선택’이라는 말이 주로 나옵니다. 과거의 것을 “취하여 상황에 조화시키는 방식(p. 159)”이라는 뜻으로 전통을 받아들이되 다 받아들이지는 말고 어느정도 생각을 하며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취학아동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직접 사리분별을 한다면 도와줄 필요도 없겠죠. 하지만 홀로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옆에서 이끌어주고 챙겨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라는 분야에 처음 발을 딛었다면 그렇기에 갖가지 해석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희대의 전문가들이 21세기에 맞게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물론 제 의견이 무조건 옳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안목은 기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따르되 받아들일지 말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름길만을 바라보고 오역을 일삼는 것보다는 이렇게 올바른 전략을 세워 왜곡됨 없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할 따름입니다.
물론 성경 그 자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신뢰성을 높이고 입체적으로 보이기에 더 믿음이 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건 그 시대의 일이고 지금은 그 때와 다르지 않느냐’라는 의견이 성경의 신뢰성을 낮추기도 하며 제일 기본이 되는 기반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원리로 이러한 상황에 적용할 것인가라는 해석은 순전히 독자의 몫입니다. 그저 이런 방식의 해석이 있다고 알려줄 따름입니다. 저는 이번 독서를 통해 무언가 가슴한편에 탁 트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느낌을 저를 비롯한 다른 분들이 느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결론
이 책은 평소에 성경을 읽고 싶어했지만 엄두가 안나 주저했던 분들, 그저 딱딱하게 느껴지는 분들을 위해서 추천합니다. 예시를 들어서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더 쉬웠습니다. 정확히 이렇게 해석해야만 한다와 같이 정답이 아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추가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앞으로 성경을 읽을 기회가 있다면, 아니 성경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성경통독을 하고싶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저희와 소통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유념하고 성경을 읽게 된다면 그 안에 담긴 속 뜻을 어떻게 해석할 지에 대한 시야가 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의 이렇게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이것으로 독서 보고서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 위키피디아 스캇 맥나이트 검색 결과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C%BA%87_%EB%A7%A5%EB%82%98%EC%9D%B4%ED%8A%B8